서교동의 유래, 잔다리 마을에서 홍대 앞까지 변해온 동네의 층위

728x90
반응형
서교동의 유래, 잔다리 마을에서 홍대 앞까지 변해온 동네의 층위

서교동의 유래, 홍대 앞 간판 뒤에 숨은 ‘잔다리 마을’의 기억

지금 서교동을 떠올리면 대부분 “홍대 앞”, “클럽과 카페, 술집이 모여 있는 젊은 거리”를 먼저 생각한다. 밤마다 사람과 음악이 넘치는 그 화려한 이미지 뒤에, 이 동네가 애초에 어떤 이름에서 출발했고 어떤 지형과 생활환경 속에서 만들어졌는지까지 함께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지명을 뜯어보면 동네의 성격과 역사가 드러난다. 서교동의 유래를 추적하는 작업은, 결국 “홍대 앞”으로 대표되는 서울 서북부 문화지대의 뿌리를 다시 짚어보는 일에 가깝다. 단순히 동 이름의 어원 하나 외우는 걸 넘어서, 왜 이곳이 지금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 물길과 다리, 교통과 개발이 어떻게 켜켜이 쌓였는지까지 함께 보는 게 분석적으로 더 의미가 있다.

이 글에서는 서교동의 유래를 세 단계로 나눠 살펴보려 한다. 첫째, 지명 자체가 어디서 왔는지, ‘서교(西橋)’라는 이름에 들어 있는 공간 정보. 둘째, 조선시대·일제강점기·해방 이후 행정 구역 변화 속에서 서교동이 어떻게 분리·명명·재편됐는지. 셋째, 잔다리 마을이라 불리던 구릉지대가 어떻게 홍대 상권·청년 문화의 플랫폼으로 변신했는지, 그 도시사적 맥락이다. 결과적으로 “서교동의 유래”라는 질문은, 작은 돌다리 두 개에서 시작해, 기찻길·택지정리·예식장·클럽이 이어지는 도시의 긴 변신 과정을 한 번에 조망하는 일이 된다.

1. ‘서교(西橋)’라는 이름 – 서쪽 다리, 잔다리에서 출발한 지명

서교동의 유래를 이해하려면, 우선 이 동네가 원래 “잔다리 마을”로 불렸다는 사실부터 짚고 가야 한다. 지금은 대부분이 복개되고, 도로와 건물로 덮여버렸지만, 원래 이 일대에는 연희동 쪽 와우산 자락에서 흘러내려온 개울이 있었다. 자료를 보면 이 물줄기를 ‘송정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개울이 지금의 동교동·서교동 일대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 흐르면서, 그 위에 작은 돌다리들이 여럿 놓여 있었다. 그 작은 돌다리를 사람들은 “잔다리”라고 불렀고, 한자로 적을 때는 ‘세교(細橋)’라고 했다. 말 그대로 ‘가는 다리, 작은 다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동네 이름이 갈라진다. 물길을 기준으로 동쪽에 놓인 위쪽 다리를 ‘윗잔다리’, 즉 동세교(東細橋)라고 불렀고, 서쪽 아래쪽 다리를 ‘아랫잔다리’, 서세교(西細橋)라고 불렀다. 이 동세교·서세교라는 표현이 나중에 행정지명으로 들어가면서 각각 ‘동세교리·서세교리’가 된다. 그리고 이 서세교리에서 ‘서교(西橋)’라는 이름이 약칭으로 뽑혀 나온다. 결국 서교동의 유래를 한 줄로 정리하면 “연희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개울 위 잔돌다리들 중, 서쪽 작은 다리 주변 마을(서세교리)에서 따온 이름”이다. 다리 하나에서 동네 이름이 갈라진 셈이다.

이 지점이 흥미로운 이유는, 오늘날 서교동을 걸어보면 “다리”를 떠올릴 만한 요소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송정내는 이미 복개되어 지하로 숨어 있고, 잔다리의 흔적은 일부 기록과 구전으로만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교(西橋)라는 이름에는 여전히 공간 정보가 살아 있다. 서쪽, 다리, 물길, 낮은 지형. 흔히 홍대 앞 언덕이라고 부르는 와우산 자락과 그 아래의 저지대, 그리고 한강 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이라는 특징이 “서쪽 다리 동네”라는 간단한 두 글자에 압축돼 있는 셈이다. 이름을 아는 순간, 풍경이 다시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2. 동교동과 쌍둥이 지명 – 동세교리·서세교리에서 동교·서교로

서교동의 유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동교동이다. 실제로 두 동네는 한 개천과 두 개의 잔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고, 행정·지명사적으로도 거의 쌍둥이처럼 움직였다. 동세교리와 서세교리라는 이름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 처음에는 “세교리(細橋里)”라는 큰 범주 아래 위아래, 동서로 나뉘어 부르다가, 행정 구획이 세분화되면서 동세교·서세교가 각각 별도 리(里)로 분화된 구조다. 여기서 동쪽 세교리에서 ‘동교(東橋)’, 서쪽 세교리에서 ‘서교(西橋)’라는 이름이 나온다. 다시 말해, 서교동의 유래는 동교동의 유래와 한 세트로 이해해야 정확해진다.

조선 후기까지 이 일대는 한성부 밖 상저십리 영역에 속하는 농촌·교외 성격이 강했다. “세교리”라는 이름은 한성부 외곽에서 한강 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의 작은 다리 마을 정도 의미였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 때, 이곳은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동세교리·서세교리로 정리된다. 여기서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동세교·서세교 한자 지명이 등장한다. 이후 1936년 경성부 구역 확장으로 이 일대가 경성부 관할로 편입되면서 동교정·서교정이라는 일본식 명칭이 부여된다. 정(町)은 일본식 동(洞)에 해당하는 하위 구획이다. 다시 말해, 동세교리→동교정, 서세교리→서교정이라는 이름 변환이 일어난 것이다.

해방 이후 1946년, 미군정과 이어지는 정부가 일본식 지명을 정리하면서 동교정·서교정은 각각 동교동·서교동으로 바뀐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동세교·서세교에서 나왔던 ‘교(橋)’ 자는 그대로 살리고, 일본식 접미사인 ‘정(町)’만 한국식 ‘동(洞)’으로 갈아 끼운 것이다. 덕분에 동교·서교라는 이름은 다리(橋)를 품고 남게 되었다. 행정용어의 변화가 지명에 남긴 흔적이다. 서교동의 유래를 따라가다 보면, 이 작은 한 글자를 통해 조선 후기 농촌 마을에서 일제강점기 근대 도시, 해방 후 서울시 행정체계로 이어지는 흐름까지 한 번에 읽히게 된다.

3. 와우산·송정내·잔다리 – 지형과 물길이 만든 동네의 바탕

지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 지형을 같이 봐야 서교동의 유래가 설득력을 갖는다. 이 일대 지도를 옛것과 지금 것을 겹쳐 놓고 보면, 구조가 명확해진다. 북쪽에는 와우산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산자락에서 물이 흘러 내려와 작은 개울을 만든다. 이 물줄기를 예전에는 송정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송정(松亭)은 지금 홍익대학교 인근 와우산 자락의 옛 지명 중 하나다. 이 송정내가 동교동과 서교동 경계부를 지나 남쪽, 한강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경계선 역할을 했다. 동시에, 사람과 물자 이동을 위해 작은 돌다리 몇 개가 설치됐다. 여기서 ‘잔다리’라는 이름이 나온다.

자료를 종합하면, 윗잔다리는 대략 오늘날 동교치안센터, 와우산로 위쪽 동네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이 곧 동세교리, 나중의 동교동이다. 아랫잔다리는 지금 서교동 교회·서교동 주민센터 일대, 상대적으로 지형이 낮은 구역에 있었던 작은 돌다리로 추정된다. 이 아래쪽 마을이 서세교리, 현재 서교동의 뿌리다. 지형적으로 보면, 와우산을 등지고 내려오는 경사면에서 물길이 형성되고, 그 물길을 건너 한강 쪽 양화나루로 가려면 반드시 이 잔다리들을 건너야 했다. “서쪽 다리 동네”라는 이름은, 이 길목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런 지형적 조건 때문에 서교동은 오랫동안 “도성 서북부와 양화나루를 잇는 통로이면서, 동시에 물가·저지대에 형성된 채소밭과 소규모 농경지의 집합지”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었다. 위쪽 연희·연남 일대가 상대적으로 고급 주택지·별장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서교·동교 일대는 한강변과 가까운 교통·물류의 길목이라는 특성과, 저지대의 불리한 점이 함께 작용했다. 서교동의 유래를 이야기할 때 “한강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작은 다리에서 동명이 나왔다”는 설명은 단순한 어원이 아니라, 이 동네의 교통·경제적 기능을 그대로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4. 일제강점기와 서교 택지 정리 – 잔잔한 구릉지에서 도시 주거지로

토대가 되는 지형과 지명이 만들어진 뒤, 서교동을 바꾼 건 근대 도시 개발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 구역 확장과 함께, 마포·서대문 일대가 본격적으로 근대적 도시 계획의 대상이 된다. 1930년대 중반, 경성부 확장으로 서세교리는 서교정이라는 이름으로 경성부 관할에 들어오고, 동시에 당인리 화력발전소로 석탄을 실어 나르던 당인선 철도가 이 일대를 가로지른다. 다만 이 시기 서교정은 아직 오늘날 우리가 아는 상업지보다는 “양화나루로 가는 길목에 한적한 채소밭이 있는 구릉지대”에 가까웠다. 철도가 지나갔지만, 본격적인 시가지는 마포·공덕·아현 쪽에 먼저 형성되었다.

서교동 변곡점은 해방 이후다. 1957년, 이 일대에 “서교 택지 정리 사업”이 시행되면서, 잔잔한 구릉지와 밭들 사이로 계획도로·택지 블록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서교동의 유래를 다루는 지명 유래 자료들을 보면, 이 사업을 기점으로 서교동이 본격적인 주거지로 개발되었다는 설명이 반복된다. 초기에는 중산층 주택·단독주택 위주로 조성되었고, 한강·시내 접근성이 좋아 ‘괜찮은 주택지’라는 인식이 붙었다. 시점적으로 보면, 1960년대 이후 서울의 팽창·도심부 주거 이전 흐름과 정확히 맞물린다. “서쪽 다리 아래 작은 마을”이었던 서세교리 일대가,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이라는 법정동·주택지로 재편되는 단계다.

이 과정에서 서교동은 동교동과 함께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한다. 북쪽 연희·연남의 언덕과 남쪽 합정·망원의 한강변 사이, 서쪽 상수·당인리 일대와 동쪽 아현·신촌 사이의 중간 지점으로서, 주거와 교통의 중간 거점이 되는 셈이다. 지명은 그대로 ‘서쪽 다리 동네’를 의미하지만, 실제 동네 풍경은 “정비된 택지+단독주택+골목 상권”으로 빠르게 변해간다. 이 단계까지가 서교동의 유래에서 ‘지명+기본 골격’이 만들어지는 구간이라면, 그 이후는 우리가 잘 아는 “홍대 앞 서교동” 이야기로 넘어간다.

5. 홍익대, 당인선 폐선, 예식장과 상권 – 서교동 이미지를 바꾼 사건들

서교동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명확하다. 홍익대학교의 존재와, 그 주변에 형성된 홍대 앞 문화다. 홍익대 자체는 서교동 북쪽 언덕, 법정동상으로는 상수동·창전동과도 접하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지만, 실질적인 상권·거리 문화의 중심은 서교동 쪽으로 확장되었다. 1970~80년대, 당인선 철도선이 완전 폐선되고, 그 주변선로 자리에 무허가 판잣집·먹자골목이 형성되면서 서교동 일부는 서민적·혼재된 거리 풍경을 갖게 된다. 동시에 70년대 말부터 서교동 일대에는 예식장·종교시설·금융기관 등이 들어섰다. 도로망이 정비되고,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결혼식 하러 가는 동네, 은행·교회·학원이 많은 동네”라는 이미지가 형성된다.

이 예식장·교회·학원·은행이 모여 있는 풍경은, 오늘날 서교동을 돌아봐도 상당 부분 남아 있다. 홍대 앞 클럽·카페 골목 사이사이에 교회·성당·학원이 눈에 띄는 이유다. 1990년대 이후, 홍대 미대 출신 예술가·밴드·인디 문화가 이 일대로 모여들면서, 서교동은 “홍대 앞 문화지대”의 핵심 배후지로 다시 포지셔닝된다. 라이브클럽·공연장·소극장·화랑·작업실, 그리고 홍대 걷고 싶은 거리·클럽 스트리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골목들이 대부분 서교동 행정구역 안에 들어간다. 서교동의 유래가 ‘서쪽 다리 마을’이었다면, 현대의 서교동 이미지는 “예식장과 교회, 은행과 인디클럽이 뒤섞인 특이한 문화·상업 복합지”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대비가 생긴다. 원래 서교동을 가로지르던 송정내 개울과 잔다리는 복개돼 자취를 감췄지만, 그 위에 “사람이 몰리는 길”이 새로 생겼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물길 위 작은 돌다리를 건너야만 한강·양화나루로 갈 수 있었다면, 지금은 지하철 2호선·경의중앙선 홍대입구역과 각종 버스 노선·택시가 서교동 중심을 통과한다. 다리가 물을 건너는 구조물에서, 사람과 정보·문화가 흐르는 네트워크로 바뀐 셈이다. 서교동의 유래를 지형·다리 중심으로 읽다가, 오늘날의 교통·상권 구조를 같이 놓고 보면, “교(橋)”라는 한 글자가 이 동네 정체성을 끝까지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6. 서교동 유래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 이름 안에 남은 레이어들

정리해보면, 서교동의 유래는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그 안에 여러 층의 의미가 겹쳐 있다. 가장 표면적인 층은 단어 그대로의 의미다. 서쪽의 다리, 서세교리, 아랫잔다리. 조금 더 들어가면, 연희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송정내, 와우산 자락, 작은 돌다리, 양화나루로 향하는 길목이라는 지형 정보가 담겨 있다. 행정·역사적 층에서는 동세교리·서세교리→동교정·서교정→동교동·서교동으로 이어지는 명칭 변천이 있고, 그 뒤에는 일제강점기 도시계획·해방 후 행정 개편·택지정리 사업이라는 사건들이 있다. 마지막 층에서는 홍익대, 당인선 폐선, 예식장·교회·금융기관 밀집, 인디문화와 상업 상권 확장이라는 현대 도시사의 흐름이 겹쳐진다.

이 레이어들을 차례로 벗겨보면, “홍대 앞 서교동”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트렌디한 동네가 아니다. 물길과 다리가 있었고, 농경과 운송의 길목이었고, 외곽 교외지였고, 중산층 택지였고, 예식장·은행·교회 동네였고, 그 위에 예술가와 음악과 상업이 겹쳐 올라간 결과물이다. 서교동의 유래를 아는 건, 이 복합적인 층위를 인지한 상태에서 동네를 보는 것과 같다. 같은 골목을 걸어도, “여기가 예전에 아랫잔다리 근처였겠구나”, “이 도로 아래 송정내 물길이 있었겠네”라는 상상이 붙는다. 도시 공간을 소비하는 태도가 단순 ‘핫플 구경’에서, 조금 더 입체적인 ‘도시 읽기’로 바뀌는 지점이다.

지명은 도시의 축약된 역사다. 서교동이라는 두 글자에, 서쪽, 다리, 물, 경계, 길, 개발, 문화라는 키워드가 한꺼번에 들어 있다. 지금 이 동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이 일대에서 살거나 일하는 사람이라면, 서교동의 유래 정도는 알고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홍대 앞”이라는 소비자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이 서 있는 장소의 역사적 깊이를 함께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동네를 오래 사랑하는 힘은, 유행하는 가게 몇 곳이 아니라, 이런 기반 정보에서 나온다. 서교동이라는 지명의 층위를 알고 나면, 같은 카페에 앉아 있더라도, 그 공간이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서교동의유래 #서교동지명유래 #잔다리마을 #동세교리서세교리 #홍대앞역사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