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영등포본동 지명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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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영등포본동 지명 유래 완전 정복: 나루터의 굿소리에서 공업도시까지

영등포·영등포본동 지명 유래 완전 정복: 나루터의 굿소리에서 공업도시까지

서울 영등포(永登浦). 이 이름을 꺼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비슷하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영등포역 환승 통로, 타임스퀘어와 NC백화점이 맞붙어 있는 역전 상권, 혹은 철공소와 오래된 공장들이 남아 있는 문래동 골목. 하지만 이 이름이 처음 지도에 등장했을 때, 영등포는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한강 물가를 끼고 학이 노닐던 모래사장 나루터, 음력 2월이 되면 무당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던 포구 마을이었다. 어떻게 해서 굿소리가 들리던 나루터의 이름이 지금의 공업·상업 거점 이름이 됐을까. 그 경로를 하나씩 짚어본다.

1. '영등포'가 처음 기록에 등장한 시점

영등포(永登浦)라는 지명이 문헌에서 처음 확인되는 시점은 조선 후기다. 정조 13년(1789년)에 시작한 호구 조사 결과를 정리한 자료집 「호구총수(戶口總數)」가 1790년경 편찬되었는데, 이 자료에서 영등포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다.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는 금천현(衿川縣) 하북면에 속한 작은 마을이었다.

조선시대 영등포가 속했던 금천현은 지금의 서울 금천구·시흥구 일대를 관할하던 행정구역이었고, 영등포 일대는 그 안에서도 한강과 인접한 포구 지역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처음부터 영등포는 포구 마을"이었다는 점이다. '포(浦)'라는 글자는 강변이나 해안의 나루·선착장 마을에 붙이는 지명 요소다. 즉 지명 자체에 이미 "물가에 기댄 마을"이라는 정체성이 내장돼 있었다.

2. '영등(靈登 → 永登)'의 어원: 굿에서 한자로

지명에서 '포(浦)'는 비교적 명확하게 풀린다. 그러나 '영등(永登)'의 기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정설이 없다. 영등포구청의 공식 설명, 영등포문화원 자료, 나무위키 역사 항목, 블로그와 지역사 연구 기사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영등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현재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설명 구조는 이렇다. 첫 번째 단계는 민속신앙이다. 우리 전통에서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일(靈登日)'이라 하여, 바람과 날씨를 관장하는 영등할미를 맞이하는 영등굿을 보름간 치렀다. 이 굿은 풍어와 뱃길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변(水邊) 제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지명화다. 영등굿이 열리는 나루터이기 때문에 "영등포(靈登浦)"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행정·지도 기록화 과정에서 "영원히 오른다"는 길한 의미의 한자 '永登'으로 바뀌었다. 세 번째 단계는 현재의 모습인 永登浦가 고정되는 과정이다.

이 민속신앙 유래설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영등굿의 특성상 반드시 물가·나루터를 무대로 했기 때문이다. 한강 하류의 포구라는 장소적 조건과 영등굿이라는 민속 풍습이 딱 맞아떨어진다. 영등포구청 공식 문화관광 자료에서도 "두 가지 유력한 견해" 중 첫 번째로 이 민속 유래설을 소개하고 있다.

3. 두 번째 유래설: 지형과 뱃길에서 나온 이름

영등포 지명 어원에 대해 제기되는 또 하나의 설명은 지형적 특성에 기반한다. 일부 지역사 연구와 블로그 기록에서는 "길게 늘어진 포구(永=길다, 登=오르다, 浦=포구)"라는 지형 묘사가 지명으로 굳어졌다는 해석도 제시된다. 혹은 '영등(迎登, 맞아올린다)'처럼 뱃사람들이 강을 올라오는 배를 맞이하는 포구라는 의미에서 비롯됐다는 견해도 있다.

이 지형 설명은 "학이 노닐던 모래사장과 언덕이 이어지는 포구"라는 방학호진(放鶴湖津)의 경관 묘사와도 연결된다. 여의도 샛강 상류 쪽으로 흰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지고, 낮은 언덕에 소나무가 무성했던 이 지형은 조선시대 뱃사람과 나그네들에게 충분히 인상적인 랜드마크였다. 다만 지명 전문가들은 이 지형 설명보다는 민속신앙 유래설이 더 많은 자료와 맥락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4. 방학호진(放鶴湖津) – 영등포 이름이 태어난 정확한 지점

영등포 지명 논의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공간이 있다. 바로 방학호진(放鶴湖津)이다. 조선 후기 지리학자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도진조(渡津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방학호진이 있는데, 그 나루터는 서울 마포로 가는 길이다." 또한 그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도 영등포 나루터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다.

방학호진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영등포문화원의 기록과 서울시 표석 자료를 보면, 이 나루터는 "학이 노닐다 가는 호수 같은 나루"라는 의미로 불렸다. 흰 모래사장과 소나무 언덕이 어우러진 경치가 빼어나 학이 내려앉는 경관을 빗댄 이름이다. 조선 고종 때는 이 일대에 '방학정(放鶴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질 만큼, 경관 명소로도 유명했다.

이 방학호 나루터는 현재 영등포여자고등학교 북쪽, 신길동 47번지 일대로 비정된다. 영등포구청의 영등포본동 동유래 자료에도 "방학호진이 위치한 곳이 영등포본동"이라고 명시돼 있다. 여의도 샛강이 한강 본류와 다시 합류하는 지점 가까이에 있었던 이 나루터에서, 음력 2월 초하루부터 보름간 영등굿이 열렸다. 방학호 나루터 주변의 부군당과 성황당에서 한 해의 풍년과 뱃길의 안전을 빌었다.

"영등굿을 하는 나루터" → "영등포(靈登浦)" → 행정 기록화 과정에서 "영등포(永登浦)"라는 경로가 이 방학호진을 중심으로 완성된다. 이 때문에 영등포구청은 방학호진이 있던 자리를 "영등포라는 지명이 유래된 곳"으로 규정하고 있다.

5. 방아곶이·방학곶이·방하곶 – 이름이 여러 개인 이유

방학호진을 둘러싼 지명 연구에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같은 공간에 대한 이름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방학호진(放鶴湖津)', '방아곶이', '방학곶이', '방하곶(方下串)', '방아곳지' 등이 동일하거나 인접한 지점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지역사 연구 카페의 분석에 따르면, "바위곶이 → 방아곶이 → 방학곶이 → 방학나루"로 이름이 변천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이 변천에서 '곶이(串)'는 강으로 삐죽하게 튀어나온 땅을 뜻하는 순우리말 지형 용어다. 여의도 샛강이 좁아지는 지점에서 육지가 강 쪽으로 돌출한 지형이 이 일대에 있었고, 거기에 나루터가 발달했다.

이 다양한 이름들은 조선시대 민간에서 불리던 이름과 행정 기록에 올라간 이름, 지도 제작자의 표기 방식이 서로 달랐음을 보여준다. 영등포라는 이름 역시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복수의 표기와 발음 사이에서 최종적으로 '永登浦'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6. 영등포본동 – '本'이라는 한 글자에 담긴 역사적 선언

현재 행정구역 영등포본동의 출범은 2008년 9월 1일이다. 이 날 영등포1동과 신길2동을 합쳐 '영등포본동'으로 재편했다. 행정구역 통폐합은 서울시 전역에서 여러 차례 이루어진 일이지만, 영등포본동의 경우는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니라 "지명의 기원지"라는 역사적 상징을 이름에 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본(本)'은 "근본, 뿌리, 시작점"을 의미한다. 영등포본동이 되는 영역 안에 방학호진 터가 포함되어 있고, 영등포 지명 발생의 근원지로 추정되는 공간이 이 동에 있다. 즉 영등포본동이라는 이름은 "이것이 영등포의 원래 자리다"라는 선언에 가깝다. 공업·상업지구로 이미지가 굳어진 영등포역 앞 상권이 아니라, 나루터와 굿이 열리던 자리를 기준으로 '원조 영등포'를 다시 복원한 것이다.

또한 영등포본동에는 영등포역이 위치한다. 영등포구청 동유래 자료는 이 역에 대해 "우리나라 근대화의 애환이 많이 서려 있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1899년 9월 18일 경인선 개통과 함께 역사를 시작한 영등포역은 1938년 4월 1일 잠시 '남경성역(南京城驛)'으로 불리다가, 1943년 다시 영등포역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굿이 열리던 나루터와 식민지 시대의 기차역이 같은 동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이, 영등포본동이 갖는 역사적 밀도를 요약해준다.

7. 조선시대 행정구역과 영등포의 위치

오늘날 영등포구를 이루는 지역들은 조선시대에 단일한 행정구역에 속하지 않았다. 영등포구청 문화관광 자료에 따르면, 현재 영등포구의 각 동(洞)은 조선시대 서로 다른 현(縣)·방(坊)에 흩어져 있었다.

영등포동·신길동 일대는 시흥현(始興縣) 하북면에 속했고, 당산동·문래동·양평동·대림동 일대는 시흥현 상부면이었다. 양화동 일대는 양천현(陽川縣) 남산면에, 여의도는 한성부 연희방(延禧坊)에 속했다. 즉 지금의 영등포구는 조선시대에 최소 세 개의 행정구역(금천현·시흥현·양천현·한성부)에 걸쳐 있던 지역들이 합쳐진 결과다. 이 지역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은 행정이 아니라 지형이었다. 한강과 안양천이라는 수로, 그리고 그 물길을 따라 형성된 생활권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시흥군청이 영등포리로 이전하면서 영등포의 행정적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후 1936년 일제의 경성부 구역 대확장으로 영등포 일대가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1943년 '영등포구'라는 행정구역 명칭이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영등포'라는 이름이 하나의 포구 마을에서 서울 남서부 전체를 아우르는 대형 행정구역의 이름으로 승격된 순간이다.

8. 경인선·경부선과 영등포역 – 이름을 키운 철도

지명 유래가 아무리 민속신앙과 나루터에서 시작됐다 해도, 영등포라는 이름이 지금처럼 강력한 지명 파워를 갖게 된 데에는 철도라는 결정적 변수가 있다. 1899년 9월 18일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영등포역이 함께 열렸다. 1904년에는 경부선이 개통됐고, 영등포역은 두 간선 철도의 분기점이 됐다.

철도 개통 이전 영등포는 한강 수운에 기댄 작은 포구 마을이었다. 그러나 역이 생기자 상황이 달라졌다. 교통 결절점이 된 영등포 주변으로 인구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상업과 공업이 함께 성장했다. 영등포구청 역사 자료는 "1899년 영등포역 개청과 동시에 주민 왕래가 급증했고, 1910년 시흥군청 이전 이후 교통·상업·공업의 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했다"고 설명한다.

'영등포역'이라는 이름이 생기면서 '영등포'라는 지명은 포구 마을 이름에서 역세권과 도심의 이름으로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1910년대 이후 당산동 일대에 조선피혁주식회사가 들어서고, 방직·섬유·제철 공장이 잇달아 세워지면서 영등포는 본격적인 공업 도시로 변모했다. 일제가 영등포를 공장 지대로 지정한 배경에는 테라우치 총독의 "용산은 시가지로, 공장은 영등포로"라는 방침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9. 두 개의 영등포 – 서울 영등포와 거제 영등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덧붙이자면, '영등포'라는 지명은 서울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경남 거제도에도 '영등포'라는 포구가 있었고,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지명 연구 기사들은 이 점을 근거로 "영등포라는 이름은 특정 지역에만 붙는 고유명사라기보다, 영등굿이 열리는 포구를 지칭하던 일반명사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영등굿은 전통적으로 바람신·바다신을 맞이하는 무속 제의로, 해안이나 강변 포구라면 어디서든 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영등굿을 하는 포구"를 뜻하는 '영등포'라는 이름이 한반도 여러 해안·강변 마을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가운데 서울 한강 남쪽의 영등포만이 철도·공업화의 물결을 타면서 압도적인 인지도를 갖는 고유명사로 굳어진 셈이다.

10. 지명이 말해주는 영등포의 세 가지 얼굴

지금까지 분석한 내용을 정리하면, '영등포'와 '영등포본동'이라는 이름 안에는 서로 다른 시대의 세 가지 얼굴이 겹쳐 있다.

첫 번째 얼굴은 굿과 나루터의 영등포다. 음력 2월마다 영등굿이 울리고, 학이 내려앉는 모래사장 나루터에서 마포와 한강 밤섬으로 배가 오가던 조선시대의 풍경이다. 방학호진과 방아곶이, 신길동 성황당이 이 시기 영등포의 공간적 기반이었다. 두 번째 얼굴은 철도와 공업의 영등포다. 1899년 경인선 개통 이후 역이 들어서고, 공장이 세워지고, 노동자가 몰려들면서 형성된 근대 도시의 얼굴이다. 이 시기 '영등포'는 포구 마을에서 공업 거점 도시의 이름으로 확장됐다. 세 번째 얼굴은 행정구역 영등포다. 1943년 영등포구라는 이름이 공식화되고, 해방 이후 수차례 구역 조정을 거치면서 여의도·당산·문래·대림까지 아우르는 광역 행정구역의 이름으로 자리 잡은 현재의 모습이다.

영등포본동은 이 세 가지 얼굴 중 첫 번째, 가장 오래된 얼굴을 기억하게 만드는 이름이다. 행정구역 개편과 개발로 물리적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방학호 나루터가 있던 땅을 '본(本)'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둠으로써 영등포라는 지명의 뿌리를 공식 행정 체계 안에서 보존한 셈이다.

마무리 – 지명 하나로 읽는 서울 남서부의 시간

영등포와 영등포본동의 유래를 따라가다 보면, 한 지명이 얼마나 많은 시간의 지층을 쌓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영등굿의 '靈登'에서 출발해 행정 기록의 '永登'으로 굳고, 철도와 공업도시를 거쳐 지금의 서울 남서부 거점 도시로 자리 잡기까지, 영등포라는 이름은 수백 년의 사회적 변화를 한 단어 안에 압축하고 있다.

지명 유래는 단순한 어원 탐구가 아니다. 그 이름을 처음 불렀던 사람들이 어디서 살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빌었는지, 어떻게 강을 건너고 도시를 만들어 갔는지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영등포역 앞을 지날 때 한 번쯤, 그 자리에 있었을 모래사장과 굿소리를 떠올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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