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동의 유래: 잉벌노에서 금천, 시흥까지 1500년 지명의 변천

728x90
반응형

 

시흥동의 유래: 잉벌노에서 금천, 시흥까지 1500년 지명의 변천

서울 금천구 시흥동. 지하철 1호선 시흥역, 시흥사거리, 시흥대로. 이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시흥'이라는 이름을 매일 접하지만, 이 이름이 얼마나 긴 역사를 품고 있는지를 아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시흥(始興)'이라는 한자 자체가 "처음 흥한다, 새롭게 번성한다"는 강한 선언성을 갖고 있고, 이 이름이 붙게 된 배경에는 조선 정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안양 만안교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 얽혀 있다. 거기에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1500년의 지명 변천사까지 겹치면, 시흥동이라는 이름은 서울 서남부 전체의 역사를 압축해서 담고 있는 이름이 된다.

1.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이 땅의 이름 – 잉벌노현(仍伐奴縣)

지금의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일대는 삼국시대 고구려가 한강 남쪽을 지배하던 시기에 '잉벌노현(仍伐奴縣)'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구려 장수왕 63년(475년) 무렵의 일이다. '잉벌노'는 순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음차(音借)한 표기로, 정확한 의미는 지금으로서는 복원이 어렵지만 "들판·벌판"을 뜻하는 우리말 지명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757년 경덕왕이 전국 지명을 중국식 한자 2음절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잉벌노현은 '곡양현(穀壤縣)'으로 바뀌었다. 곡(穀)은 곡식, 양(壤)은 흙·땅을 뜻한다. "곡식이 잘 자라는 기름진 땅"이라는 뜻이다. 당시 이 현(縣)은 율진현(栗津縣)의 영현(領縣)으로 편제됐다.

곡양현이라는 이름은 삼국통일 이후 고려 건국 전까지 유지됐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이후, 이 지역은 '금주(衿州)'로 재편됐다. 고려 성종 14년(995년) 경기 10현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금주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후 고려 전 기간에 걸쳐 '금주'라는 이름이 정착됐다. 금주의 '금(衿)'은 지역 특산물이나 지형과 관련된 이름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어원은 역시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2. 조선 태종이 '금천현'으로 바꾸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종 13년(1413년), 전국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금주는 '금천현(衿川縣)'으로 개칭됐다. 한강 지류인 안양천(당시엔 삼성천, 또는 금천이라고도 불렸다)이 이 지역을 관통했기 때문에 '금(衿)'에 '천(川)'을 붙인 지명이 정착됐다.

금천현은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현청(縣廳)이 지금의 시흥동 일대에 자리하면서 이 지역의 행정 중심지 기능을 했다. 한양(서울)에서 수원·충청·전라 방면으로 내려가는 관로(官路)가 이 금천현을 통과했기 때문에, 금천현은 경기 서남부의 교통·행정 요충지였다. 금천현감이 관할한 지역은 지금으로 치면 금천구·영등포구·구로구의 상당 부분과 안양시·광명시 일부까지 포괄하는 넓은 범위였다.

3. 결정적 전환점 – 정조 19년(1795년), 금천에서 시흥(始興)으로

시흥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결정적 사건은 조선 정조 19년(1795년)이다. 이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 지금의 수원 융릉)을 참배하기 위해 한양을 출발하는 대규모 능행(陵幸)을 계획했다. 기존에 이용하던 능행 경로는 동작나루를 건너 과천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이 행차를 계기로 경로를 새롭게 바꾸기로 결정했다. 동작나루 대신 노량진을 건너 지금의 안양 방향으로 직선에 가까운 새로운 도로를 개척하고, 안양천에 석교(石橋)를 놓기로 한 것이다. 이 다리가 바로 안양 만안교(萬安橋, 1795년 완공)다.

새 길을 내고 돌다리를 놓으면서 정조는 이 지역의 위상을 올려주는 조치도 함께 취했다. 금천현감을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켜 관직 품계를 높이고, 지명을 금천현에서 '시흥현(始興縣)'으로 바꿨다. 이름 변경의 근거는 고려 성종 때 금주의 별호(別號)로 쓰이던 '시흥'을 복원한 것이었다.

여기서 '시흥(始興)'이라는 한자의 의미가 중요하다. '처음 시(始)', '흥할 흥(興)'. "처음으로 흥성함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정조가 새 길을 낸 것을 기념하고, 이 지역이 새롭게 번성하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아 '시흥'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해석된다. 블로그·지역사 자료들은 이를 "새롭게 길을 내면서 새롭게 흥함이 시작된다는 뜻으로 시흥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설명한다. 1795년 이후 이 지역은 시흥현(始興縣)으로 불렸고, 이 이름이 현재 금천구 시흥동으로 이어지는 지명의 직계 조상이 됐다.

4. 시흥현의 공간적 범위와 중심지

1795년 시흥현이 된 이후, 이 지역의 관할 범위는 상당히 넓었다. 금천구청 자료에 따르면 시흥현 시절 관할구역은 지금의 금천구·영등포구·동작구·관악구·구로구와 안양시·광명시 일부를 포함하는 광역 범위였다.

그리고 이 광역 시흥현의 행정 중심지, 즉 현청(縣廳)이 있던 곳이 바로 지금의 금천구 시흥동이었다. 현재 '시흥5동' 지역에 시흥군청이 자리했던 것으로 기록된다. 시흥관아·시흥행궁(정조의 능행 시 임시 거처)도 시흥동 일대에 위치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련 자료에서도 "시흥현과 시흥군이던 시절 지금의 시흥동 지역은 시흥관아, 시흥행궁, 시흥군청이 소재하는 중심지였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지금 우리가 '시흥동'이라는 좁은 법정동 이름으로 부르는 이 공간이,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일제강점기 초반까지만 해도 광역 시흥 행정구역 전체의 심장부였다는 점이 핵심이다.

5. 갑오개혁과 시흥군 – 현에서 군으로 승격

1895년 갑오개혁으로 전국 행정구역이 대폭 개편되면서, 시흥현은 '시흥군(始興郡)'으로 승격됐다. 현(縣)보다 한 단계 높은 군(郡) 단위가 된 것이다. 이 시흥군의 치소(治所), 즉 군청 소재지는 여전히 지금의 금천구 시흥동 일대에 위치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행정구역을 재편하면서 시흥군청은 1910년 영등포리(永登浦里)로 이전하게 된다. 시흥동이 시흥군의 행정 중심지 기능을 잃는 첫 번째 전환점이다. 군청이 떠난 뒤에도 '시흥'이라는 지명 자체는 동 이름으로 남아, 이 지역의 역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게 됐다.

1914년에는 일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시흥군, 과천군, 안산군이 합쳐져 거대한 통합 시흥군이 탄생했다. 이때 과천현에 속하던 서울 동작구·관악구 사당동·남현동, 서초구 일부, 과천시, 군포시, 안양시 대부분과 안산 지역까지 시흥군에 통합됐다. 1914년의 통합 시흥군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상당한 규모의 광역 행정구역이었다.

6. 두 개의 시흥이 생겨나다 – 1963년 서울 편입의 결과

현재 "서울에도 시흥, 경기도에도 시흥이 있다"는 혼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1963년에 만들어졌다.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1963년 1월 1일 서울시 구역이 대폭 확장됐고, 이때 경기도 시흥군 동면(東面)에 속하던 시흥리(始興里)·신림리·봉천리·가리봉리 등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됐다.

서울에 편입된 시흥리는 이후 '시흥동'이라는 동 이름으로 정착됐고, 나머지 경기도 지역은 계속해서 시흥군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서울시 입장에서는 "조선시대 시흥관아가 있던 역사적 중심지이니 시흥이라는 이름을 쓸 정당성이 있다"는 논리였고, 경기도 시흥군 입장에서도 오랫동안 써온 지역 명칭을 버릴 이유가 없었다.

그 결과 서울 금천구에 '시흥동(始興洞)'이 존재하고, 경기도에 '시흥시(始興市)'가 따로 존재하는 현재의 구조가 만들어졌다. 한자 표기도 같고(始興), 발음도 같다. 1989년에 경기도 시흥시가 독립 시(市)로 승격되면서 이 혼란이 공식화됐고, 이후 두 곳 모두 '시흥'이라는 이름을 나란히 쓰고 있다.

7. 금천구 시흥동 – 구의 분리와 지금의 행정 체계

1963년 서울 편입 당시 시흥동은 영등포구 관할이었다. 이후 1980년 구로구가 영등포구에서 분리될 때 시흥동은 구로구 소속이 됐다. 그리고 1995년 3월 1일,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분리·신설되면서 시흥동은 현재의 금천구 관할이 됐다.

현재 시흥동은 법정동 하나지만, 행정동은 시흥1동~시흥5동까지 다섯 개 행정동으로 나뉘어 관리된다. 금천구청 공식 자료에서 시흥동의 동명 유래를 설명하면서, "글자 그대로 '일어난다, 뻗어난다'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앞서 살펴본 '시흥(始興)'의 한자 의미, 즉 "새롭게 흥함이 시작된다"는 정조 시대의 의도와 맥을 같이한다.

8. 시흥동 831번지 일대 –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행정 중심지

나무위키 시흥동(서울) 항목은 시흥동의 역사적 무게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시흥동 831번지 일대는 무려 삼국시대 때부터 늠내(잉벌노) → 곡양 → 금주 → 금천 → 시흥의 중심지였다." 이 설명은 약간의 과장 없이 사실에 가깝다.

고구려 잉벌노현의 현치(縣治), 신라 곡양현의 중심, 고려 금주의 읍치, 조선 금천현·시흥현의 관아, 시흥군의 초기 군청 소재지까지. 고대부터 이 자리는 서울 서남부 행정의 핵심 공간이었다. 시흥관아 터와 시흥행궁 터가 현재 시흥동 일대에 있고, 정조가 능행 때 들렀던 역사적 흔적이 지금도 이 동의 이름과 함께 남아 있다.

1910년 시흥군청이 영등포로 이전하고, 1963년 서울 편입 이후 금천구의 한 동으로 축소되기까지, 이 땅의 행정적 위상은 축소됐다. 그럼에도 '시흥'이라는 이름이 이 동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행정구역은 사라져도 지명이 장소의 기억을 붙들어두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9. 시흥이라는 이름이 갖는 세 가지 층위

이 시점에서 '시흥'이라는 이름을 정리해보면 세 가지 층위가 겹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고려 시대의 별호(別號)로서의 시흥이다. 고려 성종 때 금주의 별호로 쓰인 '시흥'이 문헌에 등장한다. 조선 정조가 1795년 지명을 바꿀 때 이 별호를 의식적으로 복원했다는 점에서, 시흥이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까지 소급된다.

두 번째는 정조의 정치적 선언으로서의 시흥이다. 사도세자 능행을 위한 새로운 길 개척, 만안교 건설, 현 승격이라는 일련의 정치적 행위와 맞물려 붙여진 이름이다. '시흥(始興)'에는 "새로운 시작, 새로운 번영"이라는 의지가 담겨 있다.

세 번째는 역사적 정통성을 담은 행정 지명으로서의 시흥이다. 조선 후기 이래 시흥현·시흥군의 중심이었던 이 자리가 서울에 편입된 이후에도 '시흥동'이라는 이름을 유지함으로써, 경기도 시흥시와 별개로 이 지역이 '시흥'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원조임을 지명 차원에서 주장하고 있는 구조다.

10. 강감찬 장군과 시흥동의 연결 고리

시흥동 유래를 이야기할 때 종종 거론되는 인물이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다. 강감찬은 현재 서울 관악구 낙성대 일대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낙성대 지역이 고려 시대에는 금주(衿州) 관할이었다. 즉, 강감찬이 태어난 금주가 이후 금천현 → 시흥현 → 시흥군 → 시흥동으로 이어지는 지명 계보의 한 지점에 있었다는 뜻이다.

일부 지역사 기록에서는 강감찬과 관련된 문헌 기록에서 '시흥' 관련 지명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고도 언급한다. 물론 강감찬 시대에 이미 '시흥'이라는 이름이 쓰였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지역의 지명 계보가 고려 시대까지 소급되고, 그 지역 출신의 역사적 인물이 강감찬이라는 점에서 시흥동 일대의 역사적 뿌리가 최소 1000년 이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마무리 – 지명 하나에 쌓인 1500년의 시간

시흥동이라는 이름은 단순하게 보면 금천구의 행정동 이름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이름의 뿌리를 따라가면 고구려의 잉벌노현, 신라의 곡양현, 고려의 금주, 조선의 금천현을 거쳐 정조의 시흥현으로 이어지는 1500년의 지명 변천이 나온다. 이 모든 변화를 거치면서도 이 자리가 행정 중심지 역할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시흥(始興)'이라는 이름 자체가 새로운 흥성의 시작을 뜻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흥이라는 이름이 붙은 뒤 이 지역의 행정적 위상은 오히려 축소됐다. 군청이 영등포로 떠나고, 서울에 편입되어 금천구의 한 동으로 자리했다. 그럼에도 지명만큼은 흔들림 없이 남아서, 이 땅이 1500년 넘게 서울 서남부 역사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기억하고 있다.

#시흥동유래 #시흥始興 #금천현시흥현 #정조시흥현 #잉벌노현 #금주 #금천구시흥동 #시흥관아 #서울지명유래 #만안교 #시흥군역사 #서울근현대사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