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광종: 왕권강화와 개혁의 선구자

1. 광종의 등장과 그 시대적 배경
고려는 태조 왕건에 의해 918년 건국되었지만, 건국 초기에는 진정한 중앙집권국가라기보다 호족들의 연합체에 가까웠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그들의 지지를 얻었고, 이로 인해 29명의 부인을 두게 되었다. 이런 혼인 정책은 일시적으로는 호족 세력을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태조 사후에는 외척 간의 권력 다툼을 불러일으켰다. 태조 왕건의 뒤를 이어 둘째 아들 혜종, 그리고 세 번째 아들 정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두 왕 모두 호족과 외척 세력의 권력 다툼 속에서 안정적인 통치를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949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광종이다. 광종은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로, 휘는 왕소(王昭), 자는 일화(日華)이다. 그의 어머니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劉氏)였다. 광종은, 동복 형인 정종의 선위로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은 949년부터 975년까지 26년간이었다.
광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고려는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왕권이 약화되어 있었고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강했다. 따라서 고려가 진정한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광종은 바로 이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한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2. 광종의 주요 정책과 업적
광종은 즉위 초기에는 호족 세력들의 눈치를 살피며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즉위 7년이 지난 956년부터 본격적인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광종의 정책은 크게 노비안검법 실시, 과거제 도입, 독자적 연호 사용, 공복 제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2.1 노비안검법 실시
956년(광종 7년)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다. 이 법은 노비들의 실태를 조사하여 원래 양인이었다가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다시 양인 신분으로 되돌려주는 정책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는 인도주의적 목적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호족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강했다.
호족들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전쟁 포로나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아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과 사병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노비안검법으로 이러한 노비들이 양인으로 해방되면, 호족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자연스럽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양인이 증가하면 국가에 세금을 내는 인구가 늘어나므로 국가 재정 확충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 정책은 호족들의 강한 반발을 샀으며, 심지어 광종의 왕비인 대목왕후도 이 법의 폐지를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종은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비안검법을 강행했다. 노비안검법에 관한 구체적인 사료는 많지 않지만, 『고려사』의 대목왕후 황보씨 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광종 7년, 노비를 안검하여 그 시비를 분별하도록 명하였다. 노비인데 주인을 배반한 자가 매우 많았고, 상전을 능멸하는 풍조가 크게 유행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고 원망하였다. 대목왕후가 이를 간절히 간언하였으나, 광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2.2 과거제 도입
958년(광종 9년) 광종은 중국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도입했다. 과거제는 유교적 소양과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여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로, 이전까지는 주로 호족이나 공신의 자제들이 관직을 독점하는 경향이 있었다.
광종은 과거제를 통해 능력 있는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하여 중앙 정부에 등용함으로써, 자신에게 충성하는 관료층을 형성하고자 했다. 이는 호족 중심의 관료제에서 벗어나 왕권 중심의 관료제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쌍기는 후주에서 시대리평사(試大理評事)를 지냈던 인물로, 과거제를 주관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제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광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실제로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서도 "쌍기를 등용한 이후로는 문사(文士)들을 높이고 중용하여, 대접이 지나치게 후하셨습니다"라고 비판하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쌍기의 영향력은 컸다.
2.3 독자적 연호 사용
광종은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광덕(光德)'(949~953년)과 '준풍(峻豊)'(960~963년)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이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고려 자체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고려의 독립적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런 행위는 '칭제건원(稱帝建元)'이라 하여 황제국의 특권으로 여겨졌다.
일각에서는 광종이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다는 주장도 있으며, 일부 금석문 자료에서 광종을 '황제'로 지칭한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료인 『고려사』에는 '왕'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광종의 황제 칭호 사용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논쟁이 있다.
2.4 백관 공복 제정
960년(광종 11년) 광종은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관리들의 복장을 규정했다. 이는 관료들의 서열과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조치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복장을 통해 관리들의 위계질서를 명확히 함으로써 국가 체제를 더욱 체계화한 것이다.
3. 광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의의
광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그는 고려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는 동시에, 과도한 숙청과 공포 정치를 펼친 폭군으로도 비판받는다.
3.1 최승로의 평가
고려 성종 때 문신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에는 광종에 대한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최승로는 광종의 치세를 초기와 후기로 나누어 평가했는데, 초기 8년간의 통치는 "삼대(夏·殷·周)와 견줄 만하다"고 높이 평가한 반면, 쌍기를 등용한 이후의 치세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다.
최승로는 광종이 쌍기를 등용한 후 문사들을 지나치게 높이고, 참소를 믿어 호족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귀양 보냈으며, 궁궐을 사치스럽게 증축하고,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노비안검법으로 인해 양천(良賤)의 구분이 무너지고, 궁궐에 시위군을 지나치게 많이 두었다고 지적했다.
최승로의 이러한 비판은 그가 귀족 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광종의 정책을 평가했기 때문일 수 있다. 최승로는 광종이 호족과 공신들을 숙청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노비안검법도 부정적으로 보았다.
3.2 현대 역사학계의 평가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광종을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진 개혁 군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는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고려를 진정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광종의 여러 정책, 특히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는 단순히 호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고려 사회 전체의 개혁과 발전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과거제는 이후 고려 사회에서 관료를 선발하는 중요한 제도로 정착되었고,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의 길을 열어놓았다.
물론 광종이 호족과 왕족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점은 비판받을 수 있으나, 이는 고려 초기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과 왕권 강화라는 시대적 과제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또한 광종은 중국 여러 왕조와의 외교 활동과 국방 대책에도 힘써 고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3.3 고려사에 나타난 광종의 업적과 한계
안타깝게도 『고려사』에는 광종 시기에 대한 사료가 많이 부족하다. 이는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 초기의 많은 기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광종의 업적과 한계를 살펴볼 수 있다.
광종은 왕권 강화와 더불어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951년(광종 2년)에는 태조의 원당으로 봉은사, 어머니 유씨를 위한 원당으로 불일사를 창건했다. 또한 968년(광종 19년)에는 혜거를 국사로, 탄문을 왕사로 삼아 고려의 국사·왕사 제도를 완성했다.
한편 광종은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애독했다고 전해진다. 이 책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치국책을 담은 것으로, 광종이 이상적인 군주상을 그리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당 태종 역시 형제들과의 권력 투쟁(현무문의 변) 끝에 왕위에 올랐으나 이후 훌륭한 치세를 펼친 인물로, 광종이 자신의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광종 말년에는 과도한 숙청과 사치, 불교에 대한 집착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광종을 이어 경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옛 조정의 신하로 남아있는 사람이 4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는 광종이 얼마나 많은 신하들을 제거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4. 고려 광종의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조명
고려 광종은 고려 왕조의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고려 초기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고려가 안정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4.1 통치 이념과 역사적 맥락
광종의 통치 이념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의 구축이었다. 이는 당시 고려가 직면한 시대적 과제와 맞닿아 있었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의 세력은 여전히 강했고,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은 고려가 진정한 통일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또한 광종은 당시 중국 후주의 개혁을 모델로 삼아 고려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국제 정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군주이기도 했다. 특히 쌍기와 같은 후주 출신 인재를 등용하여 중국의 선진 제도를 고려에 도입한 것은 그의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4.2 사료 속에 나타난 인간 광종
현존하는 사료에서 광종의 개인적인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몇 가지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추측해볼 수 있다.
『고려사』에 기록된 최승로의 말에 따르면, 광종은 "뛰어난 용모와 우수한 자질"을 지녔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정관정요』를 즐겨 읽었다는 것으로 보아 학문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광종이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이상적인 군주상을 추구했던 지성인이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광종의 가족관계를 보면, 그는 이복 누이인 대목왕후 황보씨를 왕비로 맞이했고, 이복형의 딸인 경화궁부인 임씨를 후궁으로 두었다. 이러한 근친혼은 당시 고려 왕실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 광종이 왕실 내 혼인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4.3 광종의 현대적 의의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광종의 가장 큰 의의는 그가 제도적 개혁을 통해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 과거제의 도입은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의 길을 열어, 근대적 관료제의 원형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노비안검법은 비록 정치적 목적이 강했지만, 부당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인권적 측면의 의의도 찾을 수 있다. 이는 현대 사회의 인권 의식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광종은 또한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통해 고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독자적 연호 사용과 황제 칭호 등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 정체성과 독립성을 강조한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5. 결론
고려 광종은 왕권 강화와 제도 개혁을 통해 고려의 국가 체제를 정비한 개혁 군주로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도입은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물론 광종의 통치 과정에서 과도한 숙청과 공포 정치가 있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는 고려 초기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왕권 강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한계로 볼 수 있다.
광종은 고려가 태조의 건국과 통일 이후 진정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주로, 그의 업적과 의의는 한국사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그가 도입한 과거제는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한국의 관료 선발 제도로 정착되었고,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의 전통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러한 광종의 업적과 한계를 균형 있게 평가함으로써, 우리는 고려 초기 역사의 복잡한 맥락을 이해하고, 국가 발전 과정에서 제도적 개혁의 중요성을 재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 3. 고려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사기, 고대사의 핵심을 담은 정사 (0) | 2025.04.25 |
---|---|
삼국유사, 정사와 야사의 경계에서 찾은 역사 (1) | 2025.04.25 |
척준경과 무신정권의 역사적 관계 정리 (0) | 2025.04.22 |
고려의 국제 무역항, 벽란도 - 동아시아의 경제 허브를 만나다 (0) | 2025.04.01 |
고려의 대외관계 (0) | 2024.12.31 |